하나님은 왜 보이지 않는가?
성경은 하나님이 영이시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창조와 성경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자신을 알리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숨어 계신 듯한 때가 있다는 것도 성경은 숨기지 않고, 탄식의 시편으로 그 아픔을 기도의 말로 삼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숨어 계심이 강요하지 않고 사랑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식과 이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의 답
성경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신다는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
딤전 1:17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이시며 만든 것들과 같은 차원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담을 수 있는 것뿐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너무 커서 사람이 그대로 마주 대할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출 33:20).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침묵하며 물러나 계신 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자기를 알리는 길이 여럿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창조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롬 1:20
둘째는 말씀, 곧 성경입니다. 그리고 셋째, 가장 결정적인 길은 아들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씁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8
여기서 "나타내셨다"는 말은 설명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빌립이 "아버지를 보이시옵소서" 했을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 14:9). 바울도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릅니다 (골 1:15).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얼굴과 목소리를 가지고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 기독교의 중심 주장입니다. 이 점에서 성령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말씀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서 그것이 참이라는 확신을 일으키십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하나님이 숨으신다는 경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서에는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사 45:15
시편에는 더 아픈 소리가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 13:1). 이런 시편이 거룩한 말씀의 일부로 성경에 실려 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늘 겪어 온 일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증언
교부들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과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는 말(마 5:8)이 어떻게 함께 참일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 구절들은 하나님을 이미 보인 분이 아니라 장차 보일 분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볼 날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같은 소망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고전 13:12).
크리소스토무스는 구약의 환상들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몸이 없고 단순하여 앉지도 걷지도 않으시는데, 선지자들에게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맞추어 내려오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낮추어 내가 아닌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크리소스토무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려져 있다기보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을 낮추어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요한복음의 "아버지 품 속에"라는 표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품 속에 거하는 것은 단순히 보는 것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크리소스토무스. 아들은 멀리서 바라본 분이 아니라 아버지와 가장 가까이 계신 분이라서 아버지를 참되게 알려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하나님이 숨으신 것처럼 느껴지는 때의 아픔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는 시편 13편을 풀면서 이렇게 씁니다. "영혼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없는 것보다 더 죽이는 것이 없고, 그것이 돌아오는 것보다 더 소생시키는 것이 없습니다" 매튜 헨리. 그리고 이사야 45:15를 풀 때에는 이렇게 권합니다. "얼굴을 숨기시는 여호와를 기다리게 하십시오" 매튜 헨리. 숨어 계시는 때에도 하나님을 향해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기
이사야 45:15에서 "숨어 계시는"으로 옮긴 말은 히브리어 에서 나왔습니다. 이 동사는 얼굴을 가리거나 몸을 숨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쓰이는 문맥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피해 다니신다는 느낌보다는 구원자께서 일하시되 그 방식이 우리의 눈에 가려져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이사야서의 같은 구절은 곧바로 그분을 "구원자"라고 부릅니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닙니다.
신약에서 "보이지 아니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입니다. 부정 접두어 "아"와 "보다"라는 동사가 합쳐진 말로, 본래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하나님께(딤전 1:17), 또 아들이 그 형상이 되시는 하나님께(골 1:15) 씁니다. 그러니 이 말은 하나님이 감추어져 있다는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고백입니다.
또 하나는 "찾다"라는 뜻의 입니다. 예레미야 29:13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렘 29:13). 찾음은 하나님이 숨으신 분이라는 것을 전제하지만, 찾는 이에게 만남을 약속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매튜 헨리는 이 구절을 풀며, 하나님이 찾는 사람에게 헛수고를 시키신 적은 결코 없다고 말합니다 매튜 헨리.
흔한 반론과 답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누구에게나 분명히 보이게 하셨을 것이다." 이것은 진지하고 무거운 반론입니다.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라면 자기를 알고 싶어 하는 정직한 사람이 의심 속에 남아 있게 하실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진심으로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반론이 겨냥하는 질문은 성경 자신도 던집니다. 시편 기자들이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묻는 것이 바로 그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몇 가지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압도적으로 분명하게 하는 일이 사랑을 낳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모든 사람에게 강제로 드러나신다면 우리는 두려워 복종할 수는 있어도, 신뢰하고 사랑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랑은 강요로는 얻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이 모든 경우를 다 풀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설명이 충분히 와닿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이 왜 이 사람에게는 가까이 계시고 저 사람에게는 먼 듯하신지 성경도 다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이미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시 19:1), 성경이 있으며, 무엇보다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증거를 요구하고 있는가이기도 합니다. 도마에게 예수께서 보여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요 20:29). 그러나 그분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도 복되다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사람이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셨고 또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다"고 말합니다 (행 17:27). 하나님은 닿을 수 없는 분이 아니라, 찾을 수 있게 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숨어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포장한 말이다." 이 반론도 정직하게 받아야 합니다. 어떤 증거도 없는 것을 "숨어 계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어떤 반증도 소용없게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을 인정할 수 있는 만큼, 숨어 계심이 유일한 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보이지 않으니 믿어라"라고 말하지 않고, 역사 속에 오신 예수, 창조의 질서, 양심, 그리고 변화된 삶들을 증거로 내놓습니다(하나님은 계신가?). 숨어 계심은 이런 증거가 있는데도 하나님을 완전히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지, 증거 자체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도 하나님이 침묵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신다는 뜻 아닌가?" 이것은 가장 아프게 다가오는 형태의 반론입니다. 시편 22편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칩니다 (시 22:1).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위의 예수께서 바로 이 말씀으로 기도하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까지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은 그 침묵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왜"에 답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고통 밖에서 구경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은 알려 줍니다.
더 생각해 보기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신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와 상관없이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숨어 계심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도로 바꾸어 줍니다. 예수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 7:7). 믿음이 없는 사람도 질문을 가지고 두드리는 것은 막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임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히 11:6).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어떤 모습의 확실함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사랑과 신뢰를 일으키는 종류의 확실함입니까, 아니면 나를 안전한 구경꾼으로 남겨 두는 종류의 확실함입니까?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때에, 시편의 사람들처럼 그 느낌 그대로를 하나님께 말씀드려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보이신 모습을 복음서에서 한 장면만이라도 천천히 읽어 본다면 어떨까요?
더 읽으려면 하나님은 계신가?,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가?를 보십시오.
관련 질문
- 하나님은 존재하는가?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고, 창조 세계와 사람의 양심이 그분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세계의 존재와 질서, 우리 안의 도덕 감각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정표이지 수학 같은 증명은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은 증거 없는 도약이 아니라, 찾는 사람에게 만나 주시겠다는 약속을 신뢰하며 계속 찾는 일입니다.
-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성경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도 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죄로 망가졌고, 하나님은 악 가운데서도 선을 이루시며, 욥에게는 설명 대신 당신 자신을 보이셨고, 십자가에서는 고난 속으로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악이 끝나는 날을 약속하십니다.
-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가?성경은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고 말하지만, 응답이 언제나 우리가 구한 그대로라고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구하라고 가르치셨고, 겟세마네의 예수와 바울의 가시는 "아니오"와 "내 은혜가 족하다"도 응답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기도는 혼잣말이 아니라 살아 계신 아버지께 드리는 말이며, 그 응답을 시험관에서처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성경은 하나님이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오늘 그분의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중심으로, 창조와 성령과 교회의 분별 속에서 들립니다. 성령이 지금도 개인을 인도하시는 방식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다르지만, 모두 성경이 모든 말을 시험하는 기준이라는 데에는 뜻을 같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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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썼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