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

짧은 답

성경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도 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죄로 망가졌고, 하나님은 악 가운데서도 선을 이루시며, 욥에게는 설명 대신 당신 자신을 보이셨고, 십자가에서는 고난 속으로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악이 끝나는 날을 약속하십니다.

성경의 답

먼저 질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어째서 어린아이가 병들고, 전쟁과 학대가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두시는가. 이것은 가볍게 던지는 물음이 아닙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이 물음 앞에 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 물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시편과 욥기에는 같은 물음이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성경이 먼저 말하는 것은 세상이 본래 이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31

악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의 일부로 나오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장면을 전하고, 그 결과 땅이 저주를 받고 수고와 죽음이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창 3:17-19). 바울도 피조 세계 전체가 썩어짐의 종노릇 아래 탄식한다고 씁니다 (롬 8:19-22).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사랑하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였고 (창 1:27), 그 선택이 잘못되었을 때 그 파장은 한 사람을 넘어 세상 전체에 미쳤다는 것이 성경의 설명입니다. 이 점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어디까지를 사람의 자유로 설명하고 어디서부터를 하나님의 섭리로 설명할지에 대해 생각이 갈립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가?에서 따로 다룹니다.

성경은 또한 악을 당한 사람의 몫을 가볍게 만들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악 가운데서도 일하신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가 종살이를 하다가 훗날 형들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형들의 행동은 여전히 악이었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 악을 뚫고 당신의 뜻을 이루셨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8:28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도 같은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이 그 자체로 좋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헛되이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장 긴 응답은 욥기에 있습니다. 욥은 까닭 없이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대답하시지만, 그 대답은 설명이 아닙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 38:4

하나님은 욥의 고난의 이유를 끝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욥은 답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을 위로한답시고 그의 죄를 캐던 친구들을 책망하십니다 (욥 42:7).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이유를 아는 척 말하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신약에 이르면 하나님은 설명보다 더 큰 일을 하십니다. 고난을 멀리서 바라보시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이사야는 오실 종을 이렇게 그립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사 53:4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 (요 11:35), 마침내 십자가에서 악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교회의 증언

교회는 악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오래 해 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이 하나님이 지으신 어떤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 곧 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선이 상실된 상태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또 전능하신 하나님은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으므로, 악이 존재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이 선한 일이라고 판단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엔키리디온 11. 이 이해는 악을 가볍게 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악의 창조자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악이 실재한다고 말하는 방법입니다. 다만 이것이 악의 존재를 완전히 설명해 준다고 말하는 신학자는 많지 않습니다.

한편 동방과 서방 교회는 모두 하나님을 "천지의 창조주"로 고백하면서 니케아 신경, 그분이 선하시다고도 고백합니다. 이 두 고백이 함께 서 있기에 질문이 생기고, 교회는 그 긴장 속에서 기도해 왔습니다. 악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두 흐름이 있습니다. 한쪽은 사랑이 참되려면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했고, 하나님은 그 자유를 주시는 위험을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다른 쪽은 하나님이 모든 일 위에 주권자이시며, 타락마저도 그분의 지혜로운 계획 안에 있지만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두 흐름은 하나님이 선하시며 악을 이기신다는 점에서는 한마음입니다.

매튜 헨리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흔히 악에서 이러한 선을 이끌어 내십니다" 매튜 헨리. 그는 이 가시가 사단이 악을 위해 보낸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이해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풀이하면서는 마지막 날의 약속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전 슬픔의 아무 표적도 아무 기억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매튜 헨리.

원어로 보기

창세기 50:20에는 두 단어가 마주 서 있습니다. 하나는 , "악한"입니다. 이 말은 도덕적인 악과 재난을 모두 가리킬 수 있어서,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과 사람이 겪는 고통이 한 단어에 담깁니다. 다른 하나는 요셉이 "해하려 하였으나"라고 할 때의 동사 , "꾀하다, 계획하다"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이 동사는 한 문장 안에서 두 번 쓰입니다. 형들이 악을 "꾀하였고",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꾀하셨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에 두 개의 계획이 겹쳐 있었다는 말입니다. 형들의 계획은 악이었고 그 책임은 형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서 더 큰 계획이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은 이 겹침이 어떻게 가능한지 풀어 주지 않고, 다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증언합니다.

흔한 반론과 답

"전능하고 선한 하나님이 있다면 악이 있을 수 없다. 둘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이 논증은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악을 막을 수 있고 막기를 원하신다면 악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논증이 성립하려면 하나님에게 악을 허락할 만한 선한 이유가 있을 수 없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많은 철학자는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그 전제를 증명하기 어렵다고 보며, 엄밀한 의미의 논리적 모순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질문의 가장 약한 부분에 대한 답일 뿐입니다.

"그래도 어떤 고통은 너무 크고 무의미해 보인다. 어떤 선한 목적이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것이 더 어려운 물음입니다. 어린아이의 고통이나 대학살 앞에서 "더 큰 선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은 모욕처럼 들릴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모욕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직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며, 알려 주겠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욥에게조차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 악 앞에서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것, 곧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그 악을 몸으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의문을 지우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설명을 미루시는 분이기 이전에 함께 고난받으신 분이라는 점이 무게를 가집니다.

"하나님이 정말 선하시다면 왜 지금 당장 악을 끝내지 않으시는가?" 성경은 하나님이 악을 끝내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 약속의 근거는 이미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악이 끝나는 날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이유를 성경은 일부만 말합니다. 베드로는 그것이 오래 참으심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벧후 3:9), 이 말이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다림은 실제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다리는 사람이 울부짖는 기도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더 생각해 보기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한 대답은 아마 이렇게 짧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과 그분이 고난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눈물을 닦으실 것입니다. 이 대답이 지금 당장 모든 아픔을 덜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성경은 아픔 속에서 질문하는 사람을 꾸짖지 않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머리의 문제 때문입니까, 아니면 마음의 상처 때문입니까? 그 둘에는 서로 다른 응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설명해 주지 않으셔도 나는 그분을 만나기를 원합니까? 지금 고난받는 이웃에게 나는 이유를 말해 주려 하고 있습니까, 곁에 있어 주려 하고 있습니까?

더 읽으려면 고난에도 의미가 있는가?와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를 보십시오. 시편 22편과 88편을 천천히 읽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출처

  1. 아우구스티누스, 신앙 핸드북(엔키리디온) 11 — 악은 선의 결핍이며, 하나님은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신다.
  2.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신경 325/381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조.

AI가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썼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