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성경은 사람이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셨고 하나님을 위해 지으신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그 안에서 나옵니다. 스스로 의미를 만든다는 반론은 진지하게 들어야 하지만, 성경은 의미가 만들어 내는 것이기 이전에 선물로 받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성경의 답
성경이 이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먼저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 누구에게서 왔는가"를 묻게 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지음 받은 자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하늘 보좌 앞에서 장로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 4:11
내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 때문이라는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 한 걸음을 더합니다. 만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어졌을 뿐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도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6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위해 지어졌습니까?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
사 43:7
여기서 "영광"은 하나님이 자기 자랑을 위해 사람을 부려 먹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광은 어떤 분이 얼마나 훌륭한지가 알려지고 드러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도록 지음 받았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알도록 지음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예레미야도 같은 말을 합니다. 지혜로운 자도 용사도 부자도 자기 것을 자랑하지 말고, 자랑하려거든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으로 자랑하라고 합니다 (렘 9:23-24). 그러니 성경이 말하는 존재의 목적은 먼저 관계입니다. 일이나 성취보다 앞서 하나님을 아는 것, 곧 지식이 아니라 사귐입니다.
이 관계는 이웃으로 이어집니다. 율법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는 물음에 예수께서는 두 가지로 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 22:37-39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본분입니다.
전도서는 이 답을 더 선명하게 합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서" 곧 하나님을 빼고 보이는 세상만 놓고 인생을 따져 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
그러나 책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3
교회의 증언
교회는 이 질문에 오래전부터 짧은 대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647년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첫 물음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 눈여겨볼 것은 두 동사가 나란히 놓였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과 그분 안에서 기뻐하는 일이 서로 다투지 않습니다. 의무와 기쁨이 하나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자기 삶의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고백록』의 첫머리에서 그는 하나님께 "우리 마음은 주님 안에서 쉬기까지 쉼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1. 사람의 마음이 끝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은 결함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위해 지음 받았는지 가리키는 표지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대한 주석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생을 하나님을 아는 일과 이어서 설명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면, 이 지식에서 우리가 나아갈수록 영생에서도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을 아는 일은 한 번 끝나는 일이 아니라 끝없이 자라 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매튜 헨리는 전도서 마지막 장을 풀면서 "하나님을 경외함은 흔히 마음속의 참된 종교 전체를 가리키며 삶에서의 실천적 결과를 포함합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경외는 두려워 떠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 전체와 그에 따른 삶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기
전도서의 열쇠가 되는 말은 입니다. 흔히 "헛되다"로 옮기지만, 본래 뜻은 "입김"이나 "수증기"입니다. 잡으려 하면 사라지는 것, 오래 남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전도자는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소리친다기보다, 해 아래의 모든 것이 붙들 수 없는 입김 같다고 말합니다. 재산도 지혜도 쾌락도 그 자체로는 죽음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입김 같은 것들 너머에서 붙들 것을 찾습니다.
또 하나는 , "알다"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동사는 사실을 머리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가까이 사귀어 경험으로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같은 말이 남편과 아내의 친밀함에도 쓰입니다. 예레미야 9:24의 "나를 아는 것"과 요한복음 17:3의 "아는 것"(헬라어 )도 이런 앎입니다. 영생이 하나님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말은 이 낱말들에서 나옵니다.
흔한 반론과 답
"의미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가볍지 않은 반론입니다. 사랑하는 가족, 보람 있는 일, 이웃을 돕는 기쁨에서 사람들은 실제로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 사람보다 덜 선하거나 덜 진지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바깥에서 주어진 목적은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도 일리가 있습니다. 쓰임이 정해진 도구처럼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목적은 도구에게 정해진 용도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낳고 "너는 나를 아는 자로 살아라" 하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이 만드는 의미가 가짜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두 가지를 묻습니다. 하나는, 내가 만든 의미가 죽음과 기억이 사라지는 시간 앞에서도 버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바로 이 물음 앞에서 "헛되다"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나에게 부여한 의미가 정말 나를 넘어서는 무게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스스로 정한 목적은 스스로 거둘 수 있습니다. 반면 사랑받아 지음 받았다는 사실은 내가 정하지도 거둘 수도 없는 선물입니다. 물론 이 물음에 모든 사람이 같은 답을 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증명이 아니라 어느 쪽이 삶 전체를 더 잘 설명하는가를 견주어 보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구하신다면 자기중심적인 분이 아닌가?" 사람이 자기 영광만 구하면 우리는 그를 오만하다고 부릅니다. 이 반론은 그 직관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고 가장 선한 분을 선하다고 알리는 일은 오만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의 기쁨과 맞서지 않습니다. 소요리문답이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고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는 사랑의 교제 안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자기 필요를 채우시려고 우리를 만드셨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라, 우리를 지으신 것은 필요가 아니라 넘치는 사랑에서 나왔다고 교회는 고백해 왔습니다.
"고난과 상실 속에 있는 사람에게도 이런 목적이 있다는 말인가?" 몸이 아프거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삶이 목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목적이 성취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알려지고 사랑받는 데 있다면, 죽어 가는 사람과 아이와 일하지 못하는 사람의 삶도 같은 무게를 가집니다. 이 주제는 고난에도 의미가 있는가?에서 따로 살펴봅니다.
더 생각해 보기
이 글이 말하는 바는 단순합니다. 당신은 우연의 부산물이 아니라 사랑받아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 그리고 당신의 삶의 중심에는 일의 성과보다 먼저 한 분과의 사귐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독자가 이것을 곧바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 답이 틀렸다고 하기 전에, 이 답이 무엇을 약속하는지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가장 오래 붙들려 하고 있으며,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남을까요? 쉼 없는 내 마음은 무엇을 찾고 있을까요?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이어서 읽으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와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십시오. 전도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읽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관련 질문
-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성경은 하나님을 철학의 개념으로 그리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알리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분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시며, 거룩하시고,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창조주요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셨다고 믿습니다.
- 인간이란 무엇인가?성경은 사람을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같은 존엄을 가지지만, 그 형상은 죄로 훼손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집니다. 사람이 동물이나 물질일 뿐이라는 반론에 대해 교회는 사람의 몸과 흙의 뿌리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답합니다.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성경은 삶의 방식을 규칙 목록이 아니라 사랑으로 요약합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삶이며,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위선적이라는 반론은 아프지만 정당한 면이 있고, 예수께서 먼저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 고난에도 의미가 있는가?성경은 모든 고난에 이유를 붙이지 않으며, 고난이 언제나 벌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탄식을 믿음의 말로 받아 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그리스도가 고난 속에 함께하시며, 고난받은 사람이 같은 처지의 사람을 위로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의미는 설명이 아니라 함께하심과 소망 안에서 주어집니다.
관련 주제
출처
- 웨스트민스터 총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647 — 영국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요리문답.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1 — '우리 마음은 주님 안에서 쉬기까지 쉼이 없습니다.'
AI가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썼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