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경은 삶의 방식을 규칙 목록이 아니라 사랑으로 요약합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삶이며,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위선적이라는 반론은 아프지만 정당한 면이 있고, 예수께서 먼저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성경의 답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흔히 규칙을 기대합니다. 성경도 계명을 줍니다. 그러나 가장 짧고 분명한 답은 미가서에 있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느냐는 물음에, 제물을 더 바치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답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공의는 이웃에게 정직하고 공평하게 대하는 것, 인자는 사람을 향한 신실한 사랑, 겸손은 하나님 앞에 내가 주인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산 위에서 이 길을 풀어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이어지는 산상수훈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3-5
눈여겨볼 것은 시작입니다. 산상수훈은 "이렇게 하라"가 아니라 "복이 있다"로 시작하고, 첫 번째 복은 자기에게 의가 없음을 아는 가난한 마음에 주어집니다. 이 가르침은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부족함을 아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삶 전체를 한 줄로 모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그리고 산상수훈의 끝에서는 말씀을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행하라고 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바울도 같은 요약을 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8
바울은 간음, 살인, 도둑질, 탐내는 것을 금하는 모든 계명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말씀 안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사랑은 율법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이루는 것입니다 (롬 13:9-10).
그렇다면 이 삶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경은 노력이 먼저가 아니라 은혜가 먼저라고 답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순서를 분명히 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8-9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이렇게 씁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0
선한 삶은 구원을 얻기 위한 값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에게 예비된 길입니다. 디도서도 같은 순서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을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딛 2:11-12). 이 변화는 사람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고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갈 5:22-23
일과 재물, 이웃에 대해서도 성경은 구체적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고 합니다 (골 3:23). 한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마 6:24). 그리고 헐벗고 굶주린 형제에게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말만 하고 쓸 것을 주지 않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고 묻습니다 (약 2:15-16).
교회의 증언
교회는 이 삶을 법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위(僞)크리소스토무스는 예수께서 "사랑하라"고 하셨지 "두려워하라"고 하시지 않았다고 풀이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움은 종에게 속하고 사랑은 아들에게 속하며, 두려움은 강요 안에 있고 사랑은 자유 안에 있습니다.
위(僞)크리소스토무스
하나님은 사람에게 종처럼 섬김받기를 원하시지 않고 아버지처럼 사랑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미가서 6:8을 풀면서 이 구절이 선행으로 구원을 사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선은 죄의 용서와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을 위해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매튜 헨리
로마서 13장에 대해서도 그는 "사랑은 율법 전체에 대한 순종의 살아 있고 활동적인 원리입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지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또 에베소서 2장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며 그분의 능력으로 살리심을 받은 결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매튜 헨리. 순종은 은혜의 반대편에 있지 않고 은혜의 열매입니다.
산상수훈의 "세상의 빛" 말씀을 풀면서 위(僞)크리소스토무스는 삶이 가르침보다 앞선다고 말합니다. "잘 가르치려면 잘 사는 것이 앞서야 합니다" 위(僞)크리소스토무스.
신앙의 구체적인 적용, 곧 직업의 선택이나 재물을 쓰는 방법, 정치와 사회에 참여하는 방식 등에서는 성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판단이 갈립니다. 그러나 사랑과 정의, 은혜 위에 세워진 삶이라는 방향은 같습니다.
원어로 보기
미가서 6:8에는 중요한 낱말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 "공의" 또는 "정의"입니다. 재판에서의 올바른 판결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성경에서는 약하고 가난한 사람이 제대로 대접받도록 바로잡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삶에는 개인의 경건뿐 아니라 이웃이 바르게 대접받는 일이 들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 "인자"입니다. 변함없는 사랑, 언약에 대한 충실함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인자를 "사랑하는" 것인데, 마지못해 베푸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며 신실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헤세드를 우리도 이웃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그리스도인은 위선자다." 이 반론은 가볍게 넘길 수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정직하지 않거나, 말로는 사랑을 외치면서 사람을 상처 주는 모습을 보고 신앙에서 멀어진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상처가 실제로 컸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점에서 책임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위선을 가장 먼저 꾸짖으신 분이 예수입니다.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두고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라고 하셨습니다 (마 23:3). 매튜 헨리도 야고보서를 풀며 "참된 신앙은 모순을 허용하지 않습니다"라고 하고 "사람들이 언제나 일관된다면 얼마나 많은 죄가 예방되겠습니까!"라고 탄식합니다 매튜 헨리. 또 기독교는 우리가 선하다는 선언이 아니라 우리가 선하지 못하다는 고백에서 시작합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 은혜가 필요한 사람의 모임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위선의 변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신앙을 평가할 때에는 가장 못난 신자가 아니라 그 신앙이 따르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착하게 사는 데 하나님은 필요 없다." 맞는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중에도 정직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많고, 성경도 사람 안에 선악을 아는 양심이 있다고 봅니다. 성경은 신자만 선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어볼 것이 남습니다. 왜 선해야 하는가, 힘센 사람 앞에서도 약한 사람의 편에 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이유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데서 찾습니다. 또 선하게 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 앞에서, 성경은 용서와 새 힘이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산상수훈은 아무도 지킬 수 없는 기준이다." 이것도 정직한 반론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마음으로도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 앞에서 누구도 자기가 합격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이 말씀을 먼 이상으로 읽고, 어떤 이는 우리를 은혜로 이끄는 거울로 읽으며, 또 어떤 이는 성령으로 새 힘을 얻은 사람이 실제로 걸어가야 할 길로 읽습니다. 교회 안에도 해석의 강조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복이 있다"로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에베소서 2장의 순서는 어느 해석에서도 지켜집니다. 우리는 완성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자라 가는 사람으로서 이 길을 걷습니다.
더 생각해 보기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의 성경적 답은 짧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이웃에게 정의롭고 신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답이 짐으로 느껴진다면 순서를 다시 보십시오. 먼저 받은 사랑이 있고,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사는 삶이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가 가장 먼저 일치시켜야 할 말과 행동은 무엇일까요? 내 일과 돈은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지금 내 이웃은 누구이며,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 하나는 무엇일까요?
더 읽으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와 은혜란 무엇인가?, 용서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십시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를 한 번에 읽어 보는 것도 좋은 시작입니다.
관련 질문
-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성경은 사람이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셨고 하나님을 위해 지으신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그 안에서 나옵니다. 스스로 의미를 만든다는 반론은 진지하게 들어야 하지만, 성경은 의미가 만들어 내는 것이기 이전에 선물로 받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 사랑이란 무엇인가?성경은 사랑을 감정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이 하신 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고, 그 사랑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이웃,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부르심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에는 감정과 몸의 반응도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핵심은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데 있습니다.
- 은혜란 무엇인가?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호의와 선물이며, 그 선물은 우리를 용서하고 또 변화시킵니다. 성경은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은혜는 죄를 가볍게 만드는 면허가 아니라 새 삶을 가르치고 이루는 힘입니다.
- 용서는 어떻게 가능한가?성경은 용서를 먼저 받은 사람이 베푸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하셨기에, 우리도 상처 준 사람을 놓아 줄 수 있습니다. 용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는 것도, 잘못을 변명하는 것도 아니며, 정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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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썼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