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도 의미가 있는가?
성경은 모든 고난에 이유를 붙이지 않으며, 고난이 언제나 벌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탄식을 믿음의 말로 받아 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그리스도가 고난 속에 함께하시며, 고난받은 사람이 같은 처지의 사람을 위로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의미는 설명이 아니라 함께하심과 소망 안에서 주어집니다.
성경의 답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다 뜻이 있어서 그래"라고 말하는 것이 위로가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때로는 상처를 더 깊게 합니다. 성경은 그런 말투로 고난을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글도 쉬운 답을 드리지 않으려 합니다. 먼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모든 고난이 그 사람의 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고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 9:3
누가복음 13장에서도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과 실로암 망대에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눅 13:1-5). 욥기도 같은 점을 말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고난을 죄의 증거로 읽었고 그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때로 고난을 징계와 연결하기도 하지만 (히 12:5-11), 바깥에서 남의 고난의 원인을 짚어 내는 일은 예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고난받는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이 가장 먼저 보여 주는 것은 탄식입니다. 시편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항의와 눈물이 가득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 22:1
이 말은 정경에 들어 있는 기도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믿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이 시편의 첫 줄로 부르짖으셨습니다 (마 27:46). 시편 88편은 더 놀랍습니다. 이 시편은 위로로 끝나지 않고 어둠으로 끝납니다.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웠사오니" (시 88:3). 그런 기도조차 성경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돈된 신앙만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애가는 무너진 도시 위에서 울면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애 3:22-23
둘째로 성경은 고난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멀리서 지켜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고난 속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픔 자체보다 혼자라는 느낌인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그 점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께서도 고난을 당하셨기에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십니다 (히 2:18).
셋째로 성경은 어떤 고난이 사람을 빚는다고도 말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야고보도 시련이 인내를 만든다고 하고 (약 1:2-4),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를 놓고 세 번 기도했으나 이런 대답을 들었다고 전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 12:9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씀들은 고난을 겪는 사람이 스스로 돌아보며 하는 고백이지, 곁에 선 사람이 고난받는 이에게 건네는 훈계가 아닙니다. 가시는 사라지지 않았고, 바울은 약함을 기뻐하기까지 오래 기도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고난이 열매를 맺는 한 방식을 말합니다. 고난받은 사람은 같은 처지의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 1:4
교회의 증언
교부들은 고난이 하나의 이유로만 설명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구분합니다. "어떤 매는 교정을 위한 것이요, 또 어떤 매는 지난 죄를 바로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지을 죄를 막으려는 것입니다"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어떤 매는 오직 "매 뒤에 뜻밖의 구원이 이어짐으로써 구주의 선하심에 대한 더 뜨거운 사랑을 일으키려는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레고리우스. 크리소스토무스는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의 이야기를 풀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벌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크리소스토무스.
매튜 헨리도 같은 구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통이 아닌 재난에 대하여 "그것이 언제나 죄에 대한 특별한 형벌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 로마서 5장에서는 환난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이루는데, 환난 자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 안에서, 환난과 함께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은혜가 그렇게 합니다" 매튜 헨리. 고난이 사람을 빚는 것은 고난에 그런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을 풀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우리를 즐겁게 하려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되도록 하려는 것이기도 합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원어로 보기
신약에서 고난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말은 입니다. 이 말은 짓눌리고 압박당하는 상태를 그립니다. 우리말 성경은 흔히 "환난"으로 옮깁니다. 고난이 처음부터 부드러운 말로 포장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그것이 눌림이라고 있는 그대로 말합니다.
로마서 5:3에서 이 말과 짝을 이루는 것이 , "인내"입니다. 이 단어는 "아래에 머문다"는 뜻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짐을 피해 달아나지 않고 짐 아래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를 악물고 참는 일이기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 자리에 계속 머무는 일입니다. 인내가 곧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흔한 반론과 답
"고난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잔인하다. 어떤 고난은 그저 무의미하다." 이 반론에는 진실이 있습니다. 아이의 죽음이나 오래 이어지는 병 앞에서 의미를 말하는 것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도 모든 고난에 설명을 붙이지 않습니다. 욥에게는 끝내 이유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의미는 "이 일이 일어난 이유"가 아닙니다. 고난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 그리스도께서 그 속에 함께 계신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끝내 모든 눈물을 닦으신다는 것입니다 (계 21:4). 의미는 설명이 아니라 관계와 소망 안에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빚기보다 부수는 경우가 더 많다." 이것도 사실입니다. 중독, 학대, 전쟁, 오랜 우울 속에서 사람이 더 단단해지기보다 무너지는 일은 흔합니다. 인내와 연단과 소망이 이어진다는 말씀을 그런 사람에게 휘두르면 폭력이 됩니다. 매튜 헨리가 말하듯 열매는 고난 자체에서 나오지 않고 고난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생애 안에서 모든 것이 회복된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무너진 사람이 끝내 다시 일어서는 날을 부활의 소망에 걸고 있습니다. 무너졌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88편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성경에도 고난이 죄의 결과이거나 하나님의 징계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고난을 죄의 열매로 보기도 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신다고도 말합니다 (히 12:5-11). 이 점을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바깥사람이 남의 고난의 이유를 확정하는 일을 막으셨습니다. 자기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것은 각자가 할 일이고, 곁에 있는 사람이 "네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판결하는 것은 성경의 방식이 아닙니다. 고난이 징계인지 아닌지를 어느 정도까지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생각이 다릅니다. 그러나 누구도 고난받는 사람을 정죄하는 근거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는 모두 같은 입장입니다.
더 생각해 보기
지금 고난 가운데 있다면, 이 글에서 얻어 갈 가장 중요한 것은 이유가 아닙니다. 탄식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도를 그대로 따라 해도 됩니다. 의미를 찾지 못한 날에도 하나님은 당신을 멀리하지 않으십니다. 의미를 서둘러 만들어 내지 않아도 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내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까? 지금 아픔 속에 있는 사람 곁에서 나는 설명하려는 사람입니까, 함께 있어 주는 사람입니까? 지난 고난을 통해 받은 위로를 누구에게 나눌 수 있을까요?
더 읽으려면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와 소망이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시편 22편과 예레미야애가 3장을 천천히 읽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관련 질문
-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성경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도 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죄로 망가졌고, 하나님은 악 가운데서도 선을 이루시며, 욥에게는 설명 대신 당신 자신을 보이셨고, 십자가에서는 고난 속으로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악이 끝나는 날을 약속하십니다.
-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가?성경은 하나님이 참새 한 마리와 우리의 모든 걸음까지 돌보시며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이끄신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사람의 선택과 책임도 진지하게 다룹니다. 교회는 이 둘을 어떻게 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강조를 두어 왔지만, 선하신 하나님의 손에 우리가 있다는 위로에는 한마음입니다.
- 소망이란 무엇인가?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잘되겠지" 하는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확신 있는 기대입니다. 소망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인내로 기다리게 하고,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잡게 합니다. 그 끝에는 눈물이 씻기고 만물이 새로워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교회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그 죽음은 하나님이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표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 주는 표입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설명하느냐에는 교회 안에 여러 그림이 있지만, 그 중심에 사랑과 대속이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한 목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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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썼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