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성령은 누구신가?

짧은 답

교회는 성령이 하나님의 막연한 힘이 아니라 성부, 성자와 함께 한 하나님이신 위격이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성령은 창조 때부터 일하셨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로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성품을 빚으십니다. 오늘날 은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이해가 있습니다.

성경의 답

성령은 신약에서 갑자기 나타나신 분이 아닙니다. 성경의 둘째 절에 이미 계십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창조의 때만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고 말씀하게 하시는 때에도 일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이 누구신지는 예수께서 떠나시기 전날 밤에 가장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가신다는 말에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6

"또 다른"이라는 말을 눈여겨볼 만합니다. 같은 종류의 또 한 분이 오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곁에서 하시던 일, 곧 가르치고 위로하고 지키는 일을 이제 성령이 하십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며 제자들 "속에" 계십니다 (요 14:17). 성령은 새 말씀을 만들어 내시기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요 14:26). 그리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그리스도를 가리키십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 16:14

약속은 오순절에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을 때였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

그날 겁 많던 제자들이 거리에 나가 담대히 예수를 전했고,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 말로 하나님의 큰일을 들었습니다. 성령은 이렇게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성령은 또한 한 사람 안에서 일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나야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8

거듭남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 수 없는 일입니다. 바람처럼 보이지 않으나 그 결과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삶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갈 5:22-23

열매라는 말은 억지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라난 것을 뜻합니다. 성령은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드시기 전에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힘일까요, 위격일까요? 성경은 성령을 인격으로 대합니다. 사람이 그분을 속일 수 있고, 근심하게 할 수 있고, 그분은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성령을 속이고"라고 책망한 뒤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 5:3-4). 성령께 거짓말한 것이 곧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입니다. 바울도 같은 점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30

힘은 근심하지 않습니다. 근심하는 것은 사랑하는 분입니다. 또 바울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씁니다 (롬 8:26).

교회의 증언

교회는 이 성경의 증언을 그대로 고백했습니다. 사도신경은 "성령을 믿사오며"로 이어지며 사도신경,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성령을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니케아 신경. 다만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말에 서방 교회가 훗날 "성자에게서도"를 더했고, 동방 교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는 지금도 두 전통을 나눕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같은 하나님이시라는 점은 하나로 고백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14장을 풀면서 이 점을 짧게 말합니다. "이분은 삼위일체 안의 성령이시니, 가톨릭 신앙은 그분이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 본질이시며 함께 영원하시다고 고백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디디무스는 성령이 "또 다른 보혜사"이되 본성이 다른 분이 아니라 일하시는 방식이 다른 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간구하셨다면, 성령은 우리의 슬픔을 위로하십니다 디디무스.

성령의 일은 기억과 이해를 일깨우는 것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봅니다. "우리가 받는 기억하도록 하는 모든 유익한 일깨움은 성령의 은혜에서 온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그레고리우스는 주께서 몸으로 떠나셔야 하는 까닭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내가 내 몸을 너희 눈에서 거두지 아니하면, 위로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너희를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는 데로 이끌 수 없다" 그레고리우스.

매튜 헨리는 요한복음 14장을 풀며 성령이 인격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여기와 다른 곳에서 쓰인 표현들은 분명히 한 위격을 나타내며, 그 직분 자체가 모든 신적 속성을 포함합니다" 매튜 헨리. 그는 성령의 방식도 이렇게 요약합니다. "먼저 깨닫게 하시고 그 후에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일이 없으면 위로도 얕아진다는 뜻입니다.

원어로 보기

구약의 와 신약의 는 둘 다 "영"이면서 "바람", "숨"입니다. 창세기 1:2의 "운행하시니라"는 새가 알 위를 맴돌듯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계셨다는 그림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바람과 성령을 한 낱말로 말씀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고, 생명을 불어넣는 숨 같은 분입니다. 다만 이 낱말이 바람이나 숨이라는 뜻도 있다는 사실이 성령이 비인격적인 힘이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성경은 이 낱말에 이름과 일과 마음을 붙여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 "보혜사"입니다. "곁으로 부름받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재판정에서 편들어 주는 변호인, 곁에서 힘을 주는 조력자, 위로하는 사람을 모두 담습니다. 요한일서 2:1에서 이 낱말은 예수께도 쓰이고, 요한복음에서는 "또 다른" 보혜사로 성령께 쓰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 곁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이어 가시는 분으로 이해됩니다.

흔한 반론과 답

"성령은 하나님의 힘이나 영향력일 뿐 위격이 아니다." 이 입장은 진지합니다. 성경은 성령을 바람, 불, 물, 기름에 견주고, "성령을 부어 주신다", "성령으로 충만하다"처럼 힘의 언어로 말하기도 합니다. 또 성부와 성자는 "아버지", "아들"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성령에게는 그런 인격의 이름이 없다는 점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같은 성경이 성령이 가르치시고, 말씀하시고, 간구하시고, 근심하시고, 뜻대로 나누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앞서 본 대로 성령을 속인 것이 하나님을 속인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께서는 "그"라고 부르시며 "또 다른" 보혜사라 하십니다. 비유로 말한 부분과 인격으로 말한 부분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설명하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삼위일체란 무엇인가?에서 더 다룹니다.

"성령의 은사는 오늘도 있는가? 아니면 사도 시대로 끝났는가?"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며, 각 입장은 성경에서 이유를 찾습니다. 어떤 이들은 방언, 예언, 병 고침 같은 은사가 사도들이 복음의 기초를 놓던 시기를 위한 표적이었고, 성경이 완성된 뒤에는 그쳤다고 봅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체험이 성경과 어긋날 수 있으니 말씀으로 시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다른 이들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 은사가 끝난다는 말이 없고 교회가 지금도 이 은사들을 경험하고 있다고 보며, 은사를 사모하라는 권면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고전 14:1). 또 어떤 이들은 이 은사들이 가능하다고 보면서도 질서와 분별을 앞세웁니다. 세 입장 모두 성령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일하신다는 것, 은사가 사랑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것, 성경이 최종 기준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바울은 은사가 여러 가지여도 "성령은 같고" 은사는 "유익하게 하려" 주신다고 말합니다 (고전 12:4-7).

"성령 체험은 그저 내 감정이 아닌가? 어떻게 구별하는가?" 정직한 질문입니다. 감정은 쉽게 흔들리고, 종교적 열기가 자기 기대를 비출 때도 있습니다. 성경이 주는 기준은 감정의 세기보다 방향과 열매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요 16:14), 성경의 말씀과 어긋나지 않으며, 사랑과 절제 같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갈 5:22-23). 아무 느낌이 없다고 성령이 계시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말하는데 (롬 8:16), 그것은 흔히 큰 감동보다 조용한 확신으로 옵니다.

더 생각해 보기

성령은 멀리 계신 이론이 아니라 가까이 계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홀로 믿음을 지키도록 남겨지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가신 것이 "유익"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요 16:7)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 자체가 성령께서 먼저 일하시는 자리일 수 있다고 교회는 말해 왔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성령을 하나의 느낌이나 힘으로만 생각해 왔습니까? 내 삶에서 사랑과 절제 같은 열매는 조금이라도 자라고 있습니까? 성령이 그리스도를 가리키신다면, 내가 성령을 구하는 일은 예수를 더 알고 싶은 마음과 이어져 있습니까?

더 읽으려면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교회는 왜 필요한가?를 보십시오.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를 천천히 읽는 것도 좋은 출발입니다.

출처

  1. 고대 교회, 사도신경 — 로마 교회의 세례 신앙고백에서 자란 서방 교회의 기본 신조.
  2.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신경 325/381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조.

AI가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썼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