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왜 필요한가?
성경은 교회를 건물이나 조직이기 전에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은 개인적이지만 혼자 하는 것이 아니어서, 말씀과 기도와 성례와 교제 속에서 자라도록 지어졌습니다. 교회는 상처와 실패를 남겨 왔으나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도 교회가 필요하다는 증언은 이어집니다.
성경의 답
"교회에 꼭 다녀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성경은 먼저 교회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신약에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씁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7
몸은 하나인데 지체는 많습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종이든 자유자든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 12:13). 눈이 손을 필요 없다고 할 수 없듯이 신자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또 지체 하나가 고통을 받으면 모두 함께 고통을 받습니다 (고전 12:26). 교회는 모임에 앞서 한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같은 사실을 가족의 그림으로도 그립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 2:19
혼자 떠도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속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그 집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고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어 간다고 합니다 (엡 2:20-22). 예수께서도 교회가 당신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내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만든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지키시는 백성입니다.
그러면 이 몸은 무엇을 하며 살아갑니까? 오순절 직후의 교회를 누가는 이렇게 그립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2:42
말씀을 배우고, 서로 나누고, 함께 먹고 성찬을 나누며, 기도합니다. 그들은 어려운 이웃의 필요를 따라 재산을 나누었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행 2:44-47). 히브리서는 이것이 오래 이어질 수 있도록 이렇게 권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4-25
모이기를 그만두는 것이 이미 "습관"이 된 사람들이 그때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길이 서로 격려받으며 걷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교회의 증언
니케아 신경은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진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니케아 신경. 사도신경도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제"를 고백합니다 사도신경. 여기서 "보편되다"는 말은 어느 한 나라나 한 시대의 모임이 아니라 모든 곳, 모든 시대의 신자를 아우르는 하나의 교회를 뜻합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지만, 그리스도 안의 하나됨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라고 교회는 고백해 왔습니다.
교부들은 교회가 서 있는 터를 두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곧 이 믿음과 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뜻입니다"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구절을 두 가지로 풀었다고 밝히며 이렇게 맺습니다. "이 두 의견 중 어느 쪽이 더 그럴듯한지는 독자가 선택하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 곧 베드로 자신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고, 그가 고백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교회의 직분과 권위에 대한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의 이해가 갈리지만, 어느 편이든 교회의 터가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라는 점은 같이 말합니다.
매튜 헨리는 에베소서 2장을 풀며 교회의 여러 그림을 모아 줍니다. "교회는 도성에 비유되며, 회심한 모든 죄인은 그 시민입니다" 매튜 헨리. 그는 교회가 또한 집이며 건물이라고 하고, 신자들이 성령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고 합니다. 히브리서를 풀 때에는 함께 모이는 일의 값을 이렇게 씁니다. "성도의 교제는 큰 도움이요 특권이며 굳게 서고 끝까지 견디는 방편입니다" 매튜 헨리.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데 서로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원어로 보기
신약에서 교회로 옮기는 낱말은 입니다. 본래 "불러 모은 회중"이라는 뜻으로, 그리스 도시에서 시민이 모이는 모임에도 쓰였고, 구약을 그리스어로 옮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을 가리켰습니다. 건물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불러 모으신 사람들이고, 그 부름에는 부르시는 분이 먼저 계십니다. 내가 교회를 고른다기보다 내가 불려 온다는 쪽에 가까운 말입니다.
또 하나는 로, 흔히 "교제"로 옮깁니다. 이 말은 "함께 나눔"을 뜻합니다. 사도행전 2:42의 교제가 그렇듯 마음만이 아니라 식탁과 재산과 기도를 나누는 일입니다. 같은 낱말이 고린도전서 10:16에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예함"으로 쓰입니다. 교회의 교제는 사람 사이의 친목이기 전에 그리스도께 함께 참여하는 일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고도 믿을 수 있다." 가장 강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믿음은 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일이다. 어떤 사람은 숲을 걸으며, 책을 읽으며, 혼자 기도하며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난다. 교회는 오히려 위선과 다툼으로 믿음을 방해해 왔다. 이 말에는 진실이 있습니다. 믿음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하나님은 어디서나 만나 주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혼자 하는 일로 그리지 않습니다. 몸의 지체는 몸에서 떨어지면 자라기 어렵습니다. 성찬과 세례는 혼자 받을 수 없고, 성경은 서로 격려하며 짐을 지라고 권합니다. 혼자서는 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비추어 주는 사람도 교회 안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 곧 믿음의 포기는 아니지만, 사랑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시험되고 자랍니다. 매튜 헨리의 표현대로 서로 다투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매튜 헨리, 그 부자연스러움을 이겨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위선과 학대와 분열이 있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때로 권력을 쥐고 약한 사람을 외면했고, 어떤 목회자와 교인은 신뢰를 이용해 사람을 해쳤습니다. 이런 일로 교회를 떠난 사람의 아픔은 가볍게 다룰 수 없습니다. 그 일을 변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를 가장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완전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만 해도 분쟁과 부도덕으로 가득했고, 바울의 편지는 대부분 그런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교회는 의인의 모임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의 모임이라고 교회는 스스로를 이해해 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가 가벼워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교회의 실패가 그리스도의 실패는 아니며, 교회가 가장 교회다운 때는 잘못을 고백하고 피해자 편에 서는 때라는 것은 말할 수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시간이 필요하고, 안전한 공동체를 찾을 자격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많이 나뉘어 있는데, 어느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정직한 물음입니다. 로마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는 교회의 터와 직분, 권위에 대해 다르게 이해하며, 서로를 어디까지 한 교회로 볼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이 글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세 전통 모두가 함께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 분 주님, 한 믿음, 한 세례, 곧 삼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원, 성경의 권위입니다. 어느 교회에 속할지는 신중히 알아보고 기도하며 정할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교회가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더 생각해 보기
교회는 완성된 곳이 아니라 자라 가는 몸입니다. 읽는 이가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면, 그 상처가 믿음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아직 교회에 가 본 적이 없다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 사람이 정직하게 질문하며 앉아 있을 자리가 교회에는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믿음을 오직 나 혼자의 일로만 생각해 왔습니까? 내 곁에서 나를 격려하고 바로잡아 줄 신앙의 벗이 있습니까? 내가 교회에서 받은 것보다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더 읽으려면 세례와 성찬은 무엇인가?, 성령은 누구신가?를 보십시오. 사도행전 2:42-47과 고린도전서 12장을 함께 읽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관련 질문
- 성령은 누구신가?교회는 성령이 하나님의 막연한 힘이 아니라 성부, 성자와 함께 한 하나님이신 위격이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성령은 창조 때부터 일하셨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로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성품을 빚으십니다. 오늘날 은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이해가 있습니다.
- 세례와 성찬은 무엇인가?세례와 성찬은 예수께서 직접 명하신 두 가지 거룩한 예식으로,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시작하는 일을, 성찬은 그분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 모두 동의하지만, 누구에게 세례를 줄 것인가와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계신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르게 이해해 왔습니다. 이 글은 그 차이를 가능한 한 공정하게 소개합니다.
- 믿음이란 무엇인가?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눈을 감고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 아니라, 신실하신 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고, 선한 삶으로 열매를 맺으며, 의심 속에서도 도움을 구하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향하는 분, 곧 그리스도께 구원이 있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성경은 삶의 방식을 규칙 목록이 아니라 사랑으로 요약합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삶이며,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위선적이라는 반론은 아프지만 정당한 면이 있고, 예수께서 먼저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관련 주제
출처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신경 325/381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조.
- 고대 교회, 사도신경 — 로마 교회의 세례 신앙고백에서 자란 서방 교회의 기본 신조.
AI가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썼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