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가?
교회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같은 한 분이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구약에도 자비가 있고 신약에도 심판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 하나님을 가장 분명히 드러내신 분입니다. 가나안 정복 같은 어려운 본문은 정직하게 마주해야 하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그 해석은 하나로 모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답
구약은 엄하고 진노하는 하나님을, 신약은 사랑이 많은 하나님을 말한다는 생각은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펼쳐 보면 두 가지가 두 책 모두에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이름을 선포하신 대목이 그 증거입니다. 모세 앞을 지나가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출 34:6
바로 다음 절에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죄를 용서하시지만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보응하신다고 (출 34:7). 자비와 공의가 한 분의 성품 안에 함께 있습니다. 이 선언은 이후 구약에서 거듭 되풀이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03:8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시 103:12
심지어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불평합니다. 니느웨를 용서하실 줄 알았기에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욘 4:2). 호세아서에서는 하나님이 배반한 백성을 두고 거의 탄식하십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 11:8
반대로 신약에도 심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아나니아는 사도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 쓰러져 죽습니다 (행 5:5).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1:18
요한복음 3:36은 아들을 순종하지 않는 자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흰 말을 탄 분이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고 그립니다 (계 19:11). 사실 신약에서 지옥에 대해 가장 많이 경고하는 분은 예수 자신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라신과 벳새다에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1:22).
두 약속은 한 분 안에서 이어집니다. 말라기는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라고 하고 (말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7
히브리서는 하나님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히 1:1-2). 새로운 하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침내 완전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하십니다 (요 14:9).
교회의 증언
교회는 이 문제를 일찍부터 겪었습니다. 2세기에 마르키온은 구약의 하나님을 정의롭고 엄한 신으로, 예수께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오직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누고, 구약과 그것을 닮은 신약의 부분을 버리자고 했습니다. 교회는 이 주장을 이단으로 거부했습니다. 예수 자신이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셨고 그것이 자기를 가리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고백하고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은 성령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니케아 신경. 한 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말씀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출애굽기 34장의 선포를 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는 그분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선하심과 사랑의 일부입니다" 매튜 헨리. 공의가 사랑과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 아나니아의 형벌에 대해서 "이 형벌은 사실 수많은 사람에게 긍휼이었습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이 해석을 모든 사람이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교회가 심판을 하나님의 사랑과 따로 두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원어로 보기
출애굽기 34:6의 "인자"는 히브리어 입니다. 언약 안에서 끝까지 신실하게 붙드는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같은 절의 "자비로운"은 인데 어머니의 태를 뜻하는 말과 뿌리가 같은 말로 알려져 있어, 품에서 나오는 깊은 연민을 그립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말들로 자기를 소개하셨습니다.
정복 이야기에서 신명기 20:17의 "진멸하되"는 입니다. 어떤 것을 하나님께 "바쳐" 일반 사용에서 떼어 놓는다는 뜻에서 나왔고, 전쟁에서는 전리품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 낱말이 곧 어려움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명령이 개인의 복수나 약탈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틀에서 말해졌음을 보여 줍니다.
흔한 반론과 답
"구약의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런 하나님은 예수의 아버지와 같을 수 없다." 이것은 가장 어려운 반론이고, 가볍게 답할 수 없습니다. 신명기 20:16-18은 가나안 성읍에서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명령하며, 읽는 사람을 흔들어 놓는 본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본문을 서로 다르게 읽습니다. 먼저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명령은 오늘 누구에게도 폭력의 근거가 되지 못하며, 매튜 헨리도 "이 규정들은 우리의 행실의 규범이 아니며, 우리의 규범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입니다"라고 선을 긋습니다 매튜 헨리.
본문 안에는 몇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그 땅에 돌아오는 것이 사백 년 뒤인 이유를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창 15:16). 곧 심판은 오래 참으신 뒤에 왔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들에게 드렸"다고 말해집니다 (신 12:31). 또 이스라엘은 자기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땅을 얻는 것이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신 9:5). 이스라엘도 같은 불순종 때문에 뒤에 땅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2장의 라합처럼 하나님께 돌아선 가나안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해석은 여기서 갈립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문자 그대로의 하나님의 심판 명령으로 읽고, 하나님만이 생명을 거두실 권리를 가지신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이 고대 근동의 전쟁 기록에서 흔한 과장된 승리의 언어라고 봅니다. 여호수아서가 모든 성읍을 취했다고 쓰고도 (수 11:19) 사사기는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삿 1:28). 어느 쪽도 문제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합니다. 정직하게 말해 이 본문들은 여전히 어렵고, 그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붙잡는 것은 이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내주신 분과 같은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구약의 가르침을 바로잡았다. 신약은 구약을 대체했다."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라고 하셨습니다 (마 5:43-44). 이것은 구약을 부인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원수를 미워하라"는 구절은 구약에 없습니다. 레위기 19:18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구약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해석을 바로잡으셨고, 구약의 뜻을 깊게 하셨습니다. 다만 모세의 율법이 백성의 형편에 맞춘 면이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이혼에 대해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마 19:8). 이것이 흔히 말하는 점진적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같으시되 사람에게 알려 주시는 방식이 단계를 따라 완성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이라면서, 영원한 지옥을 말하니 더 가혹하다." 이 비판은 신약이 심판을 더 분명하게 말한다는 점에서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눅 12:5). 다만 그리스도인들이 지옥의 성격(영원한 형벌인지, 소멸인지, 마침내 모두가 구원받는지)을 두고 서로 다르게 이해해 왔음을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천국과 지옥에서 따로 다룹니다. 여기서 말할 것은 하나뿐입니다. 신약의 심판 경고는 구약처럼 구원의 초대와 함께 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벧후 3:9). 에스겔서도 같은 마음을 말합니다 (겔 33:11).
더 생각해 보기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이 같은 분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자기 취향에 맞는 모습으로 줄여서 말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드러운 하나님만 원하는 사람도, 두려운 하나님만 말하는 사람도 성경 앞에서 불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거룩하시되 용서하시고, 공의로우시되 자기를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둘이 만나는 곳이 십자가라고 믿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는 하나님의 모습은 성경 전체에서 온 것입니까, 아니면 일부만 골라 온 것입니까? 어려운 본문 앞에서 나는 답을 서둘러 찾으려 합니까, 아니면 질문을 안고 더 읽어 볼 수 있습니까? 예수를 통해 아버지를 본다면 구약의 이야기를 어떻게 다시 읽게 될까요?
더 읽으려면 하나님은 누구인가?와 성경은 어떻게 읽는가?를 보십시오.
관련 질문
-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성경은 하나님을 철학의 개념으로 그리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알리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분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시며, 거룩하시고,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창조주요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셨다고 믿습니다.
-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성경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도 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죄로 망가졌고, 하나님은 악 가운데서도 선을 이루시며, 욥에게는 설명 대신 당신 자신을 보이셨고, 십자가에서는 고난 속으로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악이 끝나는 날을 약속하십니다.
- 천국과 지옥은 실재하는가?성경은 하나님과 함께 누릴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쁨,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자리의 무서운 실재를 모두 말합니다. 천국은 구름 위의 휴양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이며, 지옥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선택을 끝까지 존중하신 결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지옥의 본성에 대해서는 영원한 형벌, 소멸설 등 서로 다른 견해가 있어, 이 글은 그것을 공정하게 소개합니다.
-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하나의 이야기로 읽을 때 가장 잘 읽힙니다. 문맥과 문학 양식을 살피고, 묵상하고 순종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교회와 함께 읽으십시오. 해석이 다양하다는 사실은 읽기를 포기할 이유가 아니라 더 겸손하고 성실하게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관련 주제
출처
- 고대 교회, 사도신경 — 로마 교회의 세례 신앙고백에서 자란 서방 교회의 기본 신조.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신경 325/381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조.
AI가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썼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