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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어떻게 가능한가?

짧은 답

성경은 용서를 먼저 받은 사람이 베푸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하셨기에, 우리도 상처 준 사람을 놓아 줄 수 있습니다. 용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는 것도, 잘못을 변명하는 것도 아니며, 정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성경의 답

성경은 용서의 이유를 우리 안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이 먼저 하신 일에서 찾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골로새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 3:13). 용서하라는 명령 앞에는 언제나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도 그것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2).

예수께서는 이 이치를 비유로 풀어 주십니다. 베드로가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하시고 (마 18:21-22) 한 종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습니다. 갚을 길이 없던 그가 엎드려 간청하자 주인은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마 18:27). 그런데 풀려난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비유는 이렇게 끝납니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마 18:32-33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은 비교가 되지 않는 액수입니다. 하나님께 진 빚이 사람이 사람에게 진 빚보다 비할 수 없이 크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는 용서를 계산으로 보지 않고 받은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게 합니다.

용서의 실제 모습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나타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종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형들이 그 앞에 엎드렸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요셉은 형들의 행위를 선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해하려" 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하고 묻고 (창 50:19),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며 형들의 가족을 돌보겠다고 합니다 (창 50:21). 그리고 그가 형들 앞에서 한 일은 먼저 "울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창 50:17). 용서는 아픔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픔을 안은 채 내리는 결정입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예수께서는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도 돌에 맞으며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 7:60). 그러나 용서를 정의의 포기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19

하나님이 갚으실 것이므로 우리는 복수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합니다 (롬 12:21). 용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용서를 주기도문의 한가운데에 두어 왔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십자가 위의 예수의 기도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예수께서는 용서하실 수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박해자들을 위하여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기도하도록 가르치려" 이렇게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토무스. 베다는 이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는 예수께서 "그분의 수난 뒤에 믿은 사람들에게서 그분은 기도의 열매를 얻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베다.

종의 비유를 풀이하면서 크리소스토무스는 한 가지를 눈여겨봅니다. 종이 일만 달란트를 빚졌을 때 주인은 그를 "악하다고 하지 않으시고 전혀 꾸짖지도 않으시며 불쌍히 여기셨으나", 동료에게 너그럽지 못했을 때 비로소 "악한 종아" 하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토무스. 히에로니무스는 "중심으로"라는 말이 "모든 거짓 화해를 없애려고 덧붙여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히에로니무스. 입으로만 하는 화해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같은 비유를 풀이하며 이렇게 씁니다. "이웃이 우리에게 끼친 잘못을 과장해서는 안 되며 복수를 꾀해서도 안 됩니다. 악인의 악함에 대한 불평과 고난받는 자의 고난에 대한 불평을 모두 하나님께 가져가 그분께 맡깁시다" 매튜 헨리. 그는 또한 이웃에게 당한 잘못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이웃에게 짓는 죄도 하나님께 대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회개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강조가 다릅니다. 누가복음 17:3은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본문을 근거로, 완전한 화해로서의 용서는 상대의 회개를 기다린다고 봅니다. 다른 이들은 십자가 위의 예수와 스데반의 기도를 근거로, 상대가 회개하기 전에도 마음에서 원한을 놓고 복수를 단념하는 것이 용서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두 전통은 모두 용서가 마음에서 우러나야 하고, 복수는 하나님께 맡겨야 하며, 회개하는 사람은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원어로 보기

신약에서 용서를 가리키는 가장 흔한 말은 입니다. 기본 뜻은 "놓아 보내다"입니다. 주기도문의 "사하여 준 것 같이"가 이 말입니다. 용서는 빚이나 죄를 쥐고 있던 손을 펴서 놓아 주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4:32의 "용서하다"는 다른 말인 입니다. 이 말은 "은혜를 베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용서가 값없이 주는 선물임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같은 동사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다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가리키는 말은 입니다. 성경에서 이 동사의 주어는 거의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용서가 먼저 하나님께 속한 일임을 보여 줍니다. 또 다른 말 는 본래 "들어 올리다, 지다"를 뜻하는데, 죄를 용서한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용서하는 분은 죄의 무게를 대신 지십니다.

흔한 반론과 답

"어떤 일은 용서할 수 없다." 이 반론은 가볍게 대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 학대를 겪은 사람, 전쟁과 폭력의 피해자에게 용서하라는 말은 상처를 한 번 더 건드릴 수 있습니다. 성경도 용서가 쉽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시간이 걸릴 수 있고, 한 번의 결단과 오랜 걸음이 함께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용서는 잘못을 잘못이라 부르는 데서 시작합니다. 요셉도 형들의 행위를 "해하려" 한 일이라 불렀고, 용서는 변명도 아니고 가해자와 다시 위험한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울의 말대로 "할 수 있거든" 평화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롬 12:18). 또 정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복수의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은 "아직 놓을 수 없다"는 정직한 고백이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인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용서가 가능한 이유는 내 힘이 아니라 내가 먼저 용서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자신이 가장 큰 잘못의 값을 치르셨다고 그리스도인은 믿습니다.

"용서하면 악이 판치게 된다. 정의는 어디 있는가?" 이 물음은 옳은 직관에서 나옵니다. 악을 악이라 부르지 않는 용서는 값싼 용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용서와 정의를 맞세우지 않습니다. 용서는 정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정의의 최종 판결이 하나님께 있다는 확신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법적 책임을 면해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범죄를 신고하고 가해자가 법의 처벌을 받게 하는 일은 용서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정부가 악을 벌하는 직분을 갖는다고도 말합니다 (롬 13:4). 용서는 내 마음이 원한의 사슬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면서 왜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는가? 그건 조건부 아닌가?" 마태복음 6:15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두렵게 들리지만, 용서를 얻는 값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의 비유가 보여 주듯,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은 그 용서가 마음에 닿아 있다면 작은 용서를 거절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닫힌 채 용서를 받았다고 믿는다면 그 믿음이 참인지 돌아보라는 경고입니다. 이 구절이 구원이 행위에 달려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참된 믿음이 맺는 열매를 말하는 것인지는 교회 안에서 강조가 달라 온 문제입니다. 어느 쪽이든 이 말씀은 용서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기억하라고 부르는 말씀입니다.

더 생각해 보기

용서는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쥐어짜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먼저 내가 얼마나 큰 빚을 탕감받았는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용서가 안 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을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 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직 놓지 못한 사람은 누구이며, 그에게서 무엇을 아직 받아 내려 하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첫걸음, 예컨대 그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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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썼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