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
교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 뒤 사흘째에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이것은 수학처럼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증거를 저울질하는 문제입니다. 빈 무덤, 여러 사람이 만난 부활하신 주님, 두려워 숨었던 제자들의 변화는 부활이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한다고 그리스도인들은 믿습니다.
성경의 답
신약은 예수께서 정말로 죽으셨고, 사흘째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가장 이른 증언은 복음서가 아니라 바울의 편지에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씁니다. 자신도 "받은 것"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전 15:3-5
많은 학자는 이 구절이 바울이 지어낸 글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 교회가 외우던 신앙고백이라고 봅니다. 바울은 십자가 사건 몇 해 뒤에 예루살렘에서 이것을 전해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부활 신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부풀려진 전설이 아니라, 사건 직후부터 있던 증언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오백여 형제에게 한꺼번에 나타나셨다고 말하고, 그 가운데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다"고 덧붙입니다. 직접 물어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전 15:6).
복음서는 빈 무덤을 전합니다. 마가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무덤에 가서 돌이 굴려진 것을 보았다고 기록합니다.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막 16:6
눈여겨볼 점이 있습니다. 첫 증인이 여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자의 증언은 흔히 무겁게 여겨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꾸며 내려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들조차 이 말을 믿지 않았다고 숨김없이 적습니다 (눅 24:11).
그리고 나타나심의 기록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를 영으로 여기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 24:39
요한복음은 함께 있지 않았던 도마가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했던 일을 전합니다 (요 20:25). 여드레 뒤에 예수께서 오셔서 그를 부르십니다. 도마의 대답은 짧지만, 복음서에서 예수께 드려진 가장 큰 고백 가운데 하나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
바울은 이 사건이 왜 중요한지도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 15:14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부활이 사실이라는 데 걸려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아름다운 가르침일 수는 있어도 "죄 가운데 있을" 사람들에게 줄 소식은 없습니다 (고전 15:17).
교회의 증언
교회는 처음부터 이것을 고백했습니다. 사도신경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으며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고백합니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도 같은 내용을 "성경대로"라는 말과 함께 되풀이합니다 니케아 신경. 동방과 서방, 모든 시대의 교회가 이 점에서 하나입니다.
교부들은 부활하신 몸이 환상이 아니라 실제 몸이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닫힌 문으로 들어오신 분이 동시에 만져지는 몸을 가지셨다는 것을 신비로 여기며 이렇게 말합니다. "부활 후의 그분의 몸이 본성은 전과 같으나 영광은 다르다" 그레고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광스러운 몸에 상처가 남은 이유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그분은 원하셨다면 영화롭게 된 몸에서 모든 흠과 상처의 흔적을 없애실 수 있었으나, 그것을 간직하신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보고 만져야만 믿으려 한 도마에게 그것을 보이셨고
아우구스티누스
크리소스토무스는 도마를 책망하기보다 그에게 베푸신 주님의 자비를 봅니다. 그는 "한 영혼을 위하여 그분은 자신의 상처를 보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크리소스토무스. 의심하는 사람을 내치지 않고 찾아가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고린도전서 15장을 풀면서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약속을 강조합니다. 그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부활을 보증받습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그리스도가 "첫 열매"이시라면 뒤따르는 수확이 있다는 뜻입니다.
원어로 보기
신약에서 부활을 가리키는 말은 입니다. "다시 일어섬"이라는 뜻이 담긴 말로, 쓰러진 사람이 다시 서는 모습을 그립니다. 영이 몸을 떠나 살아남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영혼이 불멸한다는 생각에는 익숙했지만 죽은 몸이 다시 일어선다는 생각은 낯설어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이 말을 꺼냈을 때 사람들이 비웃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행 17:32).
또 하나는 동사 , "일으키다"입니다. 고린도전서 15:4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쓰는데, 이 동사는 완료 수동태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일으키셨고, 그 결과가 지금도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부활은 지나간 한 사건일 뿐 아니라, 지금 살아 계신 분에 대한 선언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을 것이다." 이것은 가장 오래된 반론입니다. 마태복음은 대제사장들이 군인들에게 돈을 주며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고 시킨 이야기를 전합니다 (마 28:13). 그리고 이 말이 "오늘날까지" 퍼져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 반론이 처음부터 있었다는 것은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점을 양쪽이 모두 인정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반론은 가볍지 않습니다. 슬픔에 잠긴 제자들이 시신을 옮겼다면 무덤이 비는 일은 충분히 설명됩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제자들은 부활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전하다 박해를 받고 죽은 셈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어도, 자기가 꾸민 줄 아는 것을 위해서는 좀처럼 죽지 않습니다. 또 이 설명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바울과 야고보 같은 이들에게 나타나심이 왜 있었는지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매튜 헨리는 군인들의 이야기가 스스로 모순이라고 지적합니다. "군인들이 다 잠들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매튜 헨리.
"제자들은 환각을 본 것이다." 이것도 진지한 반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고인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실제로 널리 보고됩니다. 극심한 슬픔 속에서 집단의 기대가 환상을 퍼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 체험은 보통 위로를 주는 개인의 체험이고, 같은 순간에 여러 사람이 같은 모습을 보는 일은 드뭅니다. 또 환각은 비어 있는 무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던 동생 야고보(요 7:5)와, 교회를 박해하던 바울이 그렇습니다 (행 9:3-5). 환각 설명이 틀렸다고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든 사실을 한꺼번에 설명하려면 여러 가정을 겹쳐야 합니다.
"이것은 후대의 전설이며, 복음서는 서로 다르다." 복음서의 세부는 실제로 다릅니다. 여자가 몇 명이었는지, 천사가 한 명이었는지 두 명이었는지가 서로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초기 교회도 이 차이를 알고 있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조화시키려는 연구를 썼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복음서의 조화. 이 차이는 서로 베껴 쓰지 않은 독립된 증언이라는 표시로 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신뢰를 흔드는 약점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같습니다. 무덤이 비었고, 예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설이 자라려면 보통 몇 세대가 걸리는데, 부활의 선포는 사건 직후의 신앙고백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직하게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은 없다는 확신을 먼저 가진 사람에게는 어떤 증거도 충분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미리 말할 근거가 없습니다. 증거가 가리키는 곳을 열린 마음으로 따라가 볼 수 있습니다.
더 생각해 보기
부활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이기 전에 초대입니다. 도마는 직접 보고서야 믿었지만 예수께서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요 20:29). 증거는 믿음의 문을 여는 것이지, 믿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읽는 이가 아직 확신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도마의 의심도 주님은 받아 주셨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만일 부활이 사실이라면 내가 죽음과 죄책을 바라보는 방식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내가 부활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증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전제 때문일까요? 나는 도마처럼 정직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간 적이 있습니까?
더 읽으려면 예수는 누구인가?와 왜 십자가인가?를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천천히 읽는 것도 좋은 출발입니다.
관련 질문
- 예수는 누구인가?교회는 예수를 약속된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며 주님이시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칼케돈 공의회의 말로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한 분입니다. 이것은 그분을 가장 가까이서 따른 사람들이 증언한 것이며, 예수께서 직접 던지신 질문 앞에서 지금도 모든 사람이 답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 예수는 실존 인물인가?고대사를 연구하는 거의 모든 역사가는 예수가 실제로 살았고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학자들도 대체로 받아들이는 결론입니다. 가장 이른 신약의 증언과 로마·유대 쪽 기록이 서로 독립적으로 같은 사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교회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그 죽음은 하나님이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표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 주는 표입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설명하느냐에는 교회 안에 여러 그림이 있지만, 그 중심에 사랑과 대속이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한 목소리입니다.
- 예수는 하나님인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시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이것은 후대에 덧붙인 교리가 아니라 신약의 증언을 따라 니케아 공의회가 정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구별되면서도 같은 본질을 가지신다는 것이 그 뜻입니다.
관련 주제
출처
- 고대 교회, 사도신경 — 로마 교회의 세례 신앙고백에서 자란 서방 교회의 기본 신조.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신경 325/381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조.
- 아우구스티누스, 복음서의 조화 — 네 복음서 기록의 차이를 다룬 초기의 체계적 연구.
AI가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썼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