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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모순이 있는가?

짧은 답

성경에는 서로 달라 보이는 대목이 분명히 있습니다. 교회는 이를 증언자들의 시각 차이, 요약과 어림수, 필사 과정의 변이, 글의 종류로 이해해 왔고, 이런 설명이 모든 경우를 풀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인정해 왔습니다. 성경의 신뢰는 모든 세부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데가 아니라 증언이 가리키는 사건과 그 중심 메시지에 있다고 그리스도인들은 믿습니다.

성경의 답

성경은 자기 안에 서로 다른 증언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누가는 복음서를 쓰면서 이미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고 말하고 (눅 1:1-2), 자기는 어떻게 썼는지를 밝힙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눅 1:3-4

저자들은 같은 사건을 여러 사람의 기억과 자료로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가 책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전해집니다. 이것이 정말 모순인지는 구체적인 본문을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두 가지를 정직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가룟 유다의 죽음. 마태복음은 유다가 후회하여 은 삼십을 성전에 던지고 나가서 목매어 죽었다고 합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 27:5

그 돈으로 대제사장들이 토기장이의 밭을 샀고, 그래서 그 밭을 피밭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마 27:6-8). 사도행전은 베드로의 말을 전하면서 조금 다르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행 1:18

겉으로는 차이가 큽니다. 한쪽은 목매어 죽었다고 하고 다른 쪽은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졌다고 합니다. 한쪽은 대제사장이 밭을 샀다고 하고 다른 쪽은 유다가 샀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제안해 온 설명은 이렇습니다. 유다가 목을 맸고 나중에 줄이나 가지가 끊어져 몸이 떨어져 터졌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또 돈이 유다의 것이었으므로 제사장들이 그 돈으로 산 밭을 유다가 산 것으로 말할 수 있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두 책이 같은 점도 있습니다. 유다가 배반의 대가로 받은 돈이 밭과 이어졌고, 그 밭이 피밭이라 불렸으며, 그의 끝이 비참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설명들은 어디까지나 가능한 설명이지, 본문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정직합니다.

부활 아침의 기록. 네 복음서가 모두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부는 다릅니다. 마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갔고 한 천사가 돌을 굴렸다고 합니다 (마 28:1-2). 마가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가서 흰 옷 입은 "한 청년"을 보았다고 합니다 (막 16:1-5).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고 (눅 24:4), 요한은 먼저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이 무덤에 와서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요 20:1).

이것이 모순이라면 이야기의 중심이 갈려야 합니다. 그러나 네 책 모두에서 돌이 옮겨져 있었고, 무덤은 비어 있었으며, 여자들이 첫 증인이었고, 천사가 부활을 알렸습니다. 한 사람을 언급하는 책이 다른 사람이 없었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요한의 마리아는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복수로 말합니다 (요 20:2). 곧 다른 이들이 곁에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누가 24:24는 제자 몇이 무덤에 가서 확인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요한이 말한 베드로의 방문과 어울립니다. 천사가 한 명인지 두 명인지도, 한 명만 언급했다고 해서 두 번째가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의문을 푸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세부들을 끝내 맞추기 어렵다고 보며, 그러면서도 핵심 증언은 신뢰할 만하다고 봅니다.

교회의 증언

이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복음서들이 서로 어긋난다는 비판에 답하려고 『복음서의 조화』를 썼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복음서의 조화. 이 책에서 그는 복음서 기자들이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순서와 방식으로 기억하고 요약했을 뿐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대한 주석에서 그는 한 복음서 기자가 앞선 이야기의 순서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베드로의 부인을 서술하려고 되돌아갔고, 그 일 뒤에 다시 아침으로 돌아와 사건의 흐름을 이어 갑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오늘의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어도, 고대인은 사건의 시간순과 이야기의 배열을 다르게 해도 속이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이런 차이를 정리해서 하나의 복음서로 합치지 않고 네 복음서를 그대로 둔 것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2세기에 타티아누스가 네 복음서를 하나로 엮은 책을 냈지만 교회는 결국 네 복음서를 나란히 읽는 길을 택했습니다. 차이를 지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매튜 헨리도 유다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씁니다. "유다는 돈을 던지고 물러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으니, 하나님의 진노의 공포와 절망의 고뇌를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매튜 헨리. 그는 두 본문의 차이를 따지기보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를 읽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표현이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원본에는 어떤 오류도 없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 곧 구원과 신앙과 삶에 대해서는 틀림이 없다고 말하면서 세부의 표현은 열어 둡니다. 두 쪽 모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원어로 보기

마태복음 27:5의 "목매어 죽은지라"는 입니다. 목을 졸라 죽는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1:18의 "곤두박질하여"는 인데,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드문 낱말입니다. 대개 "곤두박질하여"로 옮기지만 정확한 뜻이 확실하지 않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드문 낱말 하나가 두 본문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가르기도 하므로, 둘을 가볍게 모순이라고 부르는 것도, 쉽게 맞추었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흔한 반론과 답

"성경에 오류가 하나라도 있으면 성경 전체를 믿을 수 없다." 이 반론은 가볍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라면 오류가 있을 때 그 주장이 흔들린다는 것은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성경이 무엇을 주장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은 자기가 사진 같은 정밀함으로 쓰였다고 주장하지 않고, 누가의 말처럼 "확실함"을 알게 하려는 목적을 말합니다. 법정에서 증인들이 모든 세부에서 똑같이 말하면 오히려 짜 맞춘 것이 아닌지 의심합니다. 서로 조금씩 다른 증언이 같은 중심 사건을 가리키는 것은 독립된 증언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모순도 있을 수 없다는 증명은 아닙니다. 정직하게 말해, 어떤 세부가 정말 맞추어지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도 있고, 그래도 믿음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부활과 십자가 같은 중심 사건은 이런 세부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조화시키려는 설명은 억지다. 줄이 끊어졌다는 것은 본문에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다."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두 본문을 맞추려고 덧붙인 이야기는 본문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설명은 "그럴 수 있다"는 수준이지 "그랬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순이라고 단정하려면 두 기록이 동시에 참일 수 없음을 보여야 하는데, 가능한 설명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 단정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모순이라고 단정하는 쪽에도 증명의 책임이 있습니다. 고대 역사서를 읽을 때 우리는 보통 이런 차이를 같은 방식으로 다룹니다.

"필사본마다 다르니 본문 자체를 믿을 수 없다." 어떤 차이는 실제로 필사 때문에 생겼습니다. 사무엘하 24:24는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샀다고 하고, 역대상 21:25는 기지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주었다고 합니다. 한쪽은 타작마당과 소의 값이고 다른 쪽은 성전터 전체의 값이라는 설명이 가능하고, 숫자의 전달 과정에서 생긴 변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도 그렇습니다. 가장 오래된 사본들은 16:8로 끝나고 9~20절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번역 성경이 이를 난외주로 밝힙니다. 이런 대목은 숨기지 않고 알리는 것이 교회가 본문을 대해 온 방식이며, 이 변이들이 어떤 중심 교리도 바꾸지 않는다고 학자들은 대체로 평가합니다. 본문의 전달에 대해서는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서도 다룹니다.

더 생각해 보기

성경에서 난처한 대목을 만날 때 쉬운 길은 둘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서둘러 덮거나, 하나가 보인다고 전체를 던지는 것입니다. 성경 자신의 방식은 그 둘 사이에 있습니다. 증언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차이를 정직하게 살피며, 그것들이 가리키는 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활 아침의 기록이 보여 주듯 세부가 다른 네 증언이 모두 빈 무덤과 살아나신 주님을 가리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가 성경에서 걸리는 대목은 무엇이며, 그 대목이 걸리는 이유가 증거 때문입니까, 아니면 기대한 성경의 모습과 달라서입니까? 서로 다른 증언이 같은 사건을 가리킬 때 나는 그것을 신뢰의 약점으로 봅니까, 증언의 독립성으로 봅니까?

더 읽으려면 성경은 믿을 만한가?와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를 보십시오.

출처

  1. 아우구스티누스, 복음서의 조화 — 네 복음서 기록의 차이를 다룬 초기의 체계적 연구.

AI가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썼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