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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짧은 답

성경은 하나님이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말하고, 동시에 구원은 그리스도께만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서로 다른 견해가 있으며, 성경은 그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불의하지 않으시다는 것과, 우리가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답

이 질문은 정직한 사람이 가장 불편해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 번도 예수의 이름을 듣지 못한 채 살다 간 수많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먼저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부터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경이 침묵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두고 간구하며 던진 질문은 이 질문의 밑바닥에 놓여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5

성경은 이 질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신다"고 답합니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정의롭고 자비로울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베드로도 하나님이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씁니다 (벧후 3:9). 어떤 사람이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셋째,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자신을 완전히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해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알 만한 단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20

또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에게도 양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합니다 (롬 2:15).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비와 결실기를 주십니다 (행 14:17). 아덴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시려고 시대와 경계를 정하셨다고 말합니다 (행 17:27).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구원이 그리스도께만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행 4:12

그리고 바울은 구원의 길과 복음 전파를 이렇게 이어 놓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4

여기까지가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사랑이 크시며,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셨고,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께 달려 있으며, 우리는 가서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 개개인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성경이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증언

그 빈자리를 두고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서로 다른 답을 내놓았습니다. 어느 쪽도 가볍게 선택된 것이 아니며, 모두 성경에서 출발합니다.

제한주의는 구원받으려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명시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들은 사도행전 4:12과 로마서 10:14을 가장 무겁게 읽습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나고 전파하는 자가 필요하다면, 복음 전파는 구원의 수단이며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또 로마서 1장이 말하듯 일반 계시는 사람을 핑계치 못하게 할 만큼은 충분하지만 구원에 이를 만큼의 지식을 주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매튜 헨리는 로마서 1장을 풀면서 이렇게 씁니다. "모든 사람이 많든 적든 자기가 그른 줄 아는 것을 행하고 옳은 줄 아는 것을 행하지 않으므로, 누구에게서도 무지의 변명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매튜 헨리.

포괄주의는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한다는 데는 제한주의와 같은 입장입니다. 다만 그 구원을 받는 데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을 미리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 곧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신자들이 오실 분을 아직 모른 채 하나님을 신뢰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또 고넬료에 관한 베드로의 말을 눈여겨봅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행 10:35). 매튜 헨리는 이 구절을 두 방향으로 풉니다.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가 아니고는 받아들여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참된 종교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하나님은 이름이나 종파를 개의치 않으시고 그것을 받으십니다" 매튜 헨리. 그는 이어서 "지식이나 믿음에서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신 분이 때가 되면 채워 주실 것입니다"라고 덧붙입니다 매튜 헨리. 다만 고넬료는 이미 유대교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고, 베드로가 곧 복음을 전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는 더 조심스러운 소망의 입장입니다. 일부 신학자는 하나님이 죽음 이후나 죽음의 순간에 사람을 그리스도께 만나게 하실 가능성에 소망을 둡니다. 어떤 이는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 마지막에 어떻게 될지는 하나님의 자비에 맡기고 단정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반대하는 이들은 성경이 죽음 뒤의 두 번째 기회를 약속하지 않으며, 그런 소망이 선교의 동력을 약화시킨다고 우려합니다. 이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그것은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소망일 뿐이라고 답합니다.

이 세 입장이 함께 붙드는 것도 많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덕분이며, 사람의 선행이나 다른 종교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는 모두가 같은 편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이방 철학자들 안에도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있다고 보았지만, 그 역시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 목숨을 걸었습니다.

디모데전서 2:4에 관해 매튜 헨리는 이 구원의 길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일은 "원하는 모든 사람이 이 길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시은소로 나아와 그분과의 화목을 구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 사도행전 4:12에 대해서는 이렇게 씁니다. "예수의 이름은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의 사람들에게 주어져, 그 이름으로만 신자들이 장차 올 진노에서 구원받게 됩니다" 매튜 헨리.

원어로 보기

로마서 1:20의 "핑계치 못할지니라"는 헬라어로 입니다. 법정에서 변론할 말이 없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알 만한 빛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것이지, 모든 사람이 복음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의 무게를 어떻게 읽느냐가 제한주의와 포괄주의가 갈리는 지점의 하나입니다.

로마서 2:15에서 양심으로 옮겨진 말은 입니다. 문자 그대로는 "함께 안다"는 뜻이며, 사람 안에서 자기 행동을 함께 지켜보고 증언하는 내면의 증인입니다. 바울은 이 양심이 "송사하며" 혹은 "변명"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이 없는 사람 마음에도 증인을 두셨다는 것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그것은 불공평하다. 태어난 곳 때문에 구원이 갈린다니." 이것은 강한 반론이고, 진지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이 무거워지는 대목입니다. 이 반론에 대해 먼저 인정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의 모든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반론은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으시리라는 전제를 깔고 있으며, 성경은 그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이시고 공의를 행하십니다 (창 18:25). 예수께서는 사람이 받은 것에 따라 책임을 물으실 것을 시사하셨습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눅 12:48). 우리가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공평하시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 어느 입장에서든 출발점입니다.

"그렇다면 선교는 왜 필요한가? 듣지 못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전하지 않는 편이 더 안전하지 않은가?" 포괄주의를 따르더라도 이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소식이며, 예수께서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 28:19). 또 복음을 아는 삶은 위로와 평안과 구체적인 변화를 줍니다. 구원받는 사람의 수를 계산하기 전에, 좋은 소식을 받은 사람이 그것을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제한주의자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성경 말씀대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롬 10:15).

"성경이 '핑계치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알지도 못한 것을 두고 사람을 탓하는 잔인한 말이다." 로마서 1장을 이렇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논리는 다릅니다. 그는 사람이 완전한 지식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고, 자기가 가진 빛조차 온전히 따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점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같은 처지라는 것이 로마서 1-3장 전체의 요점입니다. 또 이 말은 심판의 기준이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 안에 둔 빛과 양심에 대한 반응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서 개개인의 최종 운명을 결론짓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 이상입니다.

더 생각해 보기

이 질문은 이론으로만 다루기에는 너무 무겁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의로우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직 듣지 못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서 안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안심이 우리를 가만히 앉아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이 문제에서 확실히 주는 것은 판결의 정보가 아니라 파송의 명령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 안의 불편함은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의심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성품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인가? 내가 들은 복음을 나는 누구와 나누고 있는가? 답을 모르는 문제 앞에서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수 있는가?

더 읽으려면 예수만이 유일한 길인가?와 천국과 지옥을 보십시오. 로마서 1-3장을 한 번에 읽어 보면 이 논의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AI가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썼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