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구원은 잃을 수 있는가?

짧은 답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이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는 점, 그리고 성경의 경고가 실제라는 점에는 뜻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믿는 사람이 끝내 떨어져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개혁파, 웨슬리·알미니안, 가톨릭과 정교회가 서로 다르게 답해 왔습니다. 이 글은 각 입장을 가장 좋은 모습으로 소개하고, 불안한 사람에게 성경이 주는 위로를 함께 살핍니다.

성경의 답

이 질문은 교회 안에서 오래 논쟁된 문제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라는 데에는 모든 전통이 동의합니다. 다투는 지점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을 사람이 끝내 거절하고 떠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양쪽 모두에 힘을 싣는 것처럼 보이는 본문이 있습니다.

먼저 안전을 약속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양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28-29

바울도 같은 확신을 말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쓰고 (빌 1:6), 로마 교인들에게는 이렇게 씁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베드로는 신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벧전 1:5).

그러나 경고의 말씀도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본 사람들의 타락을 무겁게 다룹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히 6:4-6

베드로후서는 예수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뒤 다시 거기에 얽매이는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라고 합니다 (벧후 2:20). 예수께서도 포도나무 비유에서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라고 하셨고 (요 15:6),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권합니다 (고전 10:12). 로마서 11장은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함께 보라고 말합니다 (롬 11:22).

두 묶음의 본문은 모두 성경에 있습니다. 어느 쪽도 지워 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말씀들을 서로 어떻게 맞추어 읽을지를 두고 다른 길을 걸어 왔습니다.

교회의 증언

주요한 입장은 대략 세 가지입니다. 각각 가장 좋은 모습으로 보겠습니다.

개혁파 전통은 성도의 견인(堅忍), 곧 참 신자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드신다고 가르칩니다. 이 입장의 중심은 구원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시작하신 분이 이루신다면, 구원의 안전은 내 손의 힘이 아니라 아버지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면 경고 본문은 어떻게 읽습니까? 하나는 이렇습니다. 경고는 하나님께서 신자를 끝까지 지키시는 수단이며, 참 신자는 경고를 듣고 더욱 깨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렇습니다.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처음부터 참으로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두고 "저희가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라고 말합니다 (요일 2:19). 매튜 헨리는 히브리서 6장을 풀며 이 입장에 가까운 해석을 내놓습니다. "이 대목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 마침내 그분에게서 완전히 배교하게 된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않습니다" 매튜 헨리. 빌립보서 1:6에 대해서도 그는 "하나님께서 중생으로 참으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모든 영혼에게 그 일을 이루실 것임을 우리는 항상 확신할 수 있습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웨슬리·알미니안 전통은 다르게 읽습니다. 이 입장의 중심은 구원이 관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사람을 부르시고, 사람은 믿음으로 응답하며, 그 믿음은 날마다 이어져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의 "거하라"는 명령은 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이 전통은 묻습니다. 경고가 실제 위험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왜 그토록 엄중하게 주어졌겠습니까? 그렇다고 이 입장이 구원이 불안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사소한 죄나 연약함 때문에 구원을 잃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등을 돌릴 때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외부의 힘도 신자를 빼앗지 못하게 하시지만, 자기 의지로 떠나는 사람을 강제로 붙들어 두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과 정교회 전통은 구원을 세례에서 시작해 평생에 걸쳐 자라는 은혜의 삶으로 봅니다. 가톨릭은 중대한 죄가 은혜의 상태를 잃게 할 수 있지만, 참회와 고해를 통해 회복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또 특별한 계시가 없는 한 자신이 끝까지 견딜 것이라고 확실히 장담할 수는 없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굳은 소망을 가질 수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정교회는 구원을 하나님과의 연합을 향한 평생의 길로 이해하며, 사람은 이 길에서 돌아설 수도 있고 돌아올 수도 있다고 봅니다. 두 전통 모두 교회의 성례와 공동체가 신자를 붙드는 은혜의 길이라고 강조합니다.

세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인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구원의 근거는 내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가 내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 둘째, 경고는 장식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셋째, 죄를 짓고 흔들리는 사람에게도 돌아오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매튜 헨리는 베드로후서 2장의 무서운 경고를 풀고 나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대의 타락이 그대에게 슬픔이 됩니까?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매튜 헨리.

원어로 보기

히브리서 6:6에서 "타락한"으로 옮겨진 말은 입니다. 곁으로 빗나가 넘어진다는 뜻의 이 말은 신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것이 일시적인 실족인지, 아니면 믿음 전체를 버리는 일인지를 두고 오래 논쟁했습니다. 히브리서의 앞뒤 흐름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고의로 버리는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넘어졌다가 슬퍼하며 돌아오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이 점은 모든 전통이 인정합니다. 다만 그런 사람이 원래 참 신자였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또 하나는 요한복음 15장의 , "거하다"입니다. 이 동사는 머무르며 지속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고 명하시면서 동시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신자의 책임을,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더 크게 읽습니다. 두 쪽이 한 말씀 안에 함께 있습니다.

흔한 반론과 답

"구원을 잃을 수 없다면, 사람들은 마음대로 살아도 되지 않는가?" 이것은 무겁게 다루어야 할 반론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실제로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파 전통은 이렇게 답합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열매를 맺으며, 열매가 전혀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은혜로 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대 진영도 이 점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안전을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안전을 방종의 핑계로 삼는 데 있습니다.

"구원을 잃을 수 있다면, 누가 안심할 수 있겠는가?" 이것 역시 정직한 반론입니다. 매일 자신이 충분히 믿는지 점검하며 사는 사람에게 이 교리는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웨슬리 전통은 이렇게 답합니다. 신자는 불안 속에서가 아니라 확신 속에서 걷도록 부름받았으며, 그 확신은 자기 힘이 아니라 지금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데서 옵니다. 가톨릭도 은혜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에 굳게 소망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불안은 경고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시선이 그리스도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옮겨 갈 때 생깁니다. 요한은 이 편지를 쓴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 5:13

"결국 성경이 스스로 모순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고와 약속은 대립하지 않고 같은 목적을 향한다고 교회는 보아 왔습니다. 경고는 방심하는 사람을 깨우고, 약속은 두려워하는 사람을 붙들어 줍니다. 한 본문이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에 대해서는 신실한 학자들이 서로 다르게 결론 내립니다. 자신이 속한 전통과 다른 전통을 만났을 때 서로를 이단으로 몰 이유는 없으며, 이 문제는 역사적으로 이단 판정의 선이 아니었습니다.

더 생각해 보기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구원을 잃을까 두려워 잠을 설친다면, 그 두려움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성경이 그 두려움에 주는 첫 대답은 점검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 6:37). 지금 그분께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다는 표지입니다. 반대로 구원이 확실하다는 말에 안주해 있는 사람에게는, 거하라는 부르심이 오늘의 순종을 요청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 안전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나의 믿음의 힘입니까, 아니면 나를 붙드시는 분입니까? 내가 속한 전통이 있다면, 그와 다른 해석에서 배울 점은 무엇입니까? 경고의 말씀은 나를 겁주는 말입니까, 깨우는 말입니까?

더 읽으려면 구원이란 무엇인가?와 은혜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로마서 8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는 것도 좋습니다.

출처

  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3 — 독일 개혁교회의 요리문답. 제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

AI가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썼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